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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HOYA, 호야는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다만 빛을 비출 뿐이다
초록바다.../초록바다의 두런두런 ⊙⊙⊙

● 親

by 호야의 초록바다 2015. 3. 19.

   

 


나는 어떤 한자보다도 ‘親’자을 좋아한다.
이는 ‘親’자가 들어간 말에 친밀감과 호감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 형제, 동기보다는 친부모, 친형제, 친동기가 더 다감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어디 그뿐이랴. 친구(親舊), 친서(親書), 친지(親知), 친정(親庭), 친목(親睦), 친밀(親密), 친애(親愛), 친근(親近) 친절(親切), 친화(親和) 등도 더할 수 없이 좋지 않는가!
親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애야(愛也)’, 근야(近也), 궁야(躬也) 등으로 나와 있다.
즉 親에는 ‘사랑(愛’), 가까움(近), 몸소(躬) 등의 뜻을 품고 있다.
親자의 글자 구성을 보면 ‘立 +木 +見’으로 되어 있다.
즉 ‘나무 위에 서서 본다.’고 풀이가 된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학수고대(鶴首苦待)란 말이 떠오른다. 학처럼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보다 더한 기다림이 親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목을 빼고 기다리다 못해 드디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서서 보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親자가 들어간 사람임에 틀림없다.
논어의 학이편(學而篇)에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오면 또한 기쁘지 않으랴’(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했다.
먼 곳에서 오는 벗을 기다리다 못해 나무 위에까지 올라가 오는 모습을 보려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친함이 바로 ‘親’이라 여겨진다.
성경(누가15,11-24)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보아도 친(親)의 모습을 보게 된다.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챙겨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로 거들이나 어쩔 수 없어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했다.
나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며,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 주었다.
탕자인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도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려했을 것 같다.
오륜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공자는 仁을 가르치면서 ‘親親’을 강조하셨다.
親에는 사랑(愛)과 가까움(近)의 뜻이 들어 있어 ‘親親’은 ‘가까운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혈육이 가장 가까운 이니 부모형제를 누구보다도 먼저 진하게 사랑하고 점차 넓혀가면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親親’이다.
‘親’은 바로 가까이 있는 이를 사랑함(愛)이요 남을 어질(仁)게 대함이요 친절(親切)을 베풀어 친근(親近)하게 지내며, 더할 수 없이 친밀(親密)하게 이웃과 지내야 함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자라 여겨진다.
이처럼 親자에는 정겨움이 있고 기쁨이 있어 나는 이 親자를 좋아한다.

(좋은 글 중에서)

親주님! 親人으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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